전기

그의 최후 여정

1959년1월26일, 브루노 그뢰닝 파리에서 영원히 잠들다

Bruno Gröning mit Ehefrau Josette

진단:말기 위암

1958년 늦가을, 브루노 그뢰닝과 1955년 5월 결혼한 그의 두번째 부인 요제트는 자동차로 파리로 향했다. 그뢰닝은 자신을 친구이자 암전문가 피에르 그로본 박사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엑스레이 검사결과 말기위암으로 판명되었으며 그로본 박사는 바로 수술하려고 하였지만 브루노 그뢰닝은 이를 거부했다.

다시 독일로 운전하여 돌아온 그는 커뮤니티를 위해 크리스마스 행사를 준비하였다. 모든 커뮤니티의 크리스마스 축하 파티에서 사용하기 위해 12월4일 그는 녹음테이프를 하나 만들었다. 그후, 부인과 함께 다시 파리로 돌아갔으며 그와 동시에 그로본 박사는 존경받는 암수술 전문의인 벨렝거 박사에게 연락했다. 그의 클리닉은 헤너 거리에 있었으며 몽마르트에서 멀지 않았다. 12월8일 브루노 그뢰닝은 바로 이곳에서 수술을 받았으며 의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상황이 엑스레이에 나타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으로 손을 댈 수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 그 상태로 다시 봉합하였다.

놀란만한 회복속도

이 사건에 대하여 요제트 부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브루노 그뢰닝이 그의 엉망진창인 몸속 상태에 비해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는 것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호흡하였으며 지난 몇 주간 순환계통의 작동도 아주 완벽하여 혈액검사 결과도 이상적이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말기 환자라면 이미 여러 가지 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며 극소량의 음식도 구토를 멈추지 않게 하여 천천히 굶어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루노에게는 이런 증상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급속도로 회복되었으며 의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다시 운전하여 독일로 돌아왔고 크리스마스 축제에 참석하였다. 1월에는 새로 결성된 단체 대표들과 3일간 회의를 하였으며 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지시를 내렸다. 그 두 대표는 이것이 브루노 그뢰닝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거란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폭풍우속에서 행해진 파리의 수술

브루노 그뢰닝은 1월21일 비행기로 파리에 갔다. 대장이 막혔기 때문에 수술이 불가피했다. 1959년 1월 22일 오전 9시에 예정된 수술시간은 뮌헨에서 상고심 재판이 시작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브루노 그뢰닝은 다시 수술을 받았으며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없애주었던 고통을 견뎌야 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고 또한 그것이 허락되지도 않았다.

그날 오전 그뢰닝이 전신마취 상태로 수술대에 올랐을 때 파리에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쳤다.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날의 자연현상은 아주 특이했어요. 1월22일 남편이 전신마취 상태로 수술대에 누워있을 때 파리의 맑고 쾌창했던 하루는 갑자기 폭풍우의 그림자 속에 묻혀버렸어요. 갑자기 우뢰가 울고 번개가 마구 치며 사방이 캄캄해졌기에 우리는 한낮에도 전등을 켜야했어요. 간호사들은 이러한 맹렬한 폭풍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어요. 수술 며칠 후, 그뢰닝의 체온, 혈압과 맥박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심지어는 두 차례나 일어나 휠체어에 앉기도 했어요.”

“모두 타버린 내면”

월25일, 브루노 그뢰닝은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이튿날 1월26일 오후 1시 13분46초 헤너의 클리닉에서 영원히 이 세상과 작별을 하였다. 의사들은 사망 증명에 [위암으로 인한 사망]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진실로 위암이었을까? 두 번째 수술직후 벨렝거 박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브루노의 체내의 손상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내면은 철저히 타버렸다. 그가 이토록 아무런 고통이 없이 장기간 살았다는 것은 정말로 수수께끼 같은 일이다.”

몇 년 전 브루노 그뢰닝은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만약 나의 작업이 저지된다면 나의 내면은 타버릴 것이다.”;

부고

그로본 박사는 1959년2월26일 브루노 그뢰닝의 미망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뢰닝이 이러한 비참한 운명을 어떻게 견뎠는지를 토로하였다. “이 모든것(의사들이 브루노 그뢰닝을 위해서 했던 모든 노력)은 모두 당연히 해야할 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위대한 브루노 그뢰닝의 용기와 강력한 의지가 저희에게 크나큰 힘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1974년, 벨렝거 박사는 어떤 편지에서 브루노 그뢰닝에 대한 존경과 탄복을 드러냈다. “브루노 그뢰닝은 열정이 충만한 사람이며 귀한 사람이다. 그의 굳은 신념, 고통과 죽음 앞에서 보여주였던 존엄은 오늘날까지도 나에게 존경심을 자아내게 한다.”

시신의 화장후에도 최종판결은 선고되지 않았다

브루노 그뢰닝의 시신은 파리의 어느 화장터에서 화장된 후 유골함은 딜렌버그 숲속 묘지에 안치되었다.

법정에서는 그의 안건이 피고의 사망으로 종결되었음을 선포하고 최종 판결을 선고하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모두 스스로의 내면에서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다.

"허포드의 기적의 의사"로 수천 수만의 사람들을 치유했지만 파리의 어느 거리에 버려져 쓸쓸히 생을 마감하였다. 왜 이래야만 했는가? 그는 왜 이러한 고난과 씁쓸함을 감당해야 했는가? 그는 왜 자신을 구원하지 못했는가?

그레테 호이슬러(1922-2007)는 브루노 그뢰닝의 조력자였다. 그녀는 그에 의해 치유되었으며 브루노 그뢰닝 친구들 모임의 설립자이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인 구원의 체험, 그것이 진실이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브루노 그뢰닝은 짧은 그의 인생을 통해 많은 아름다움과 선함을 가져왔다. 도움과 치유는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져온 선물이며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으며 이는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1949년 그는 대중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허포드에서의 위대한 치유 이후 독일과 해외에서도 널리 거론되었다. 하지만 3개월후 치유는 금지되었고 핍박과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기소되기까지 하였다. 왜? 그는 누구한테 해를 입혔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그는 수천 수만의 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하였으며 그가 한 일은 다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무고했지만 그들은 그를 처벌하려고 했다! 그는 무고했지만 그들은 신의 명령에 따른 인류 구원을 저지시키려고 했다. 그는 파리에서 이 악의적인 결과를, 헤너 클리닉에서 이 씁쓸한 고통을 견뎌야만 했다. 그의 내면은 전달하는 것이 금지된 치유 에너지로 인해 철저히 타버렸다. 인간의 법률은 독일에서의 그의 행위를 금지시켰으며 그는 거짓말과 비방을 받으며 범죄자로 고소당했다. 그가 고립무원으로 인류의 모든 고난을 감당하고 있음을 누구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인간을 구원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의 저서인 인류의 존속을 위해 나는 산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희생양]이라는 단어를 아주 조심히 다뤄야 한다. 하지만 여기, 그뢰닝이 파리에서 돌아가셨을 때 이 단어의 무게는 이보다 더 명확할 수가 없었다.”

오직 이같은 방법으로만 그의 말이 실현 될 수 있었다. 바로 지금 무수히 많은 치유 사례들이 증언하듯이 “내가 더는 [인간]의 신분으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을 때, 내가 더 이상 나의 육체를 사용하지 않을 때 인류는 어떠한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즉 누구나 스스로의 내면에서 도움과 치유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대공판의 연속

항소절차와 개정

Bruno Gröning und Rechtsanwalt Schwander

그뢰닝에게 불리하게 시작한 공판

1958년의 항소심에서 항소를 한 것이 브루노 그뢰닝이 아니라 검찰이란 사실은 브루노 그뢰닝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 당시 변호사는 이같은 실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변호사에게 소송자료를 늦게 전달해서 항소심 준비에 차질을 초래했다.

고소인측 증인들이 더욱 의기양양 연합한 것은 브루노 그뢰닝에게 더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들은 [의사의 금지 규정]의제에 대해 서로 합의한 것처럼 보였다.

교도소, 벌금과 집행유예, 치유문제에 대해 명확히 밝히지 않은 “불명예”

이번 판결은 다음과 같았다: 부주의로 인한 사망: 징역8개월,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위반:벌금 5000마르크. 집행유예.

첫 번째 공판뿐만 아니라 두 번째 공판에도 참석한 에니 프라인 에브나 폰 에슌바는 이번 판결을 [독일의 치욕]이라고 표현했다.

브루노 그뢰닝은 그가 처벌을 받게 된 것은 좋은 일을 했기 때문이라고 선언하였다. 공판이 진행되는 내내 어느 누구도 심지어 그의 변호사도 치유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며 만약 누군가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면 그의 작업이 의학적인 치유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소송은 취하되었을 것이라고 원망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법정 내에서 이 문제를 밝히는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뢰닝에 대해 선입견이 있었으며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다.

사망직전의 항소 신청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브루노 그뢰닝이 항소하였으며 청문회는 1959년1월22일 뮌헨 고등법원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브루노 그뢰닝이 같은 달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이 병을 사라지게 하다"

치유는 계속되었다 – 1심법원의 치유금지에도 불구하고...

Ein Ehepaar dankt Bruno Gröning

육체의 회복과 내면의 변화

이러한 분쟁과 논란에도 브루노 그뢰닝의 작업은 계속되었다. 1957년, 의학저널 기자 호스트 만 박사는 “그의 말이 병을 치료한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잡지 Das Neue Blatt의 시리즈 기획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하멜린에서부터 강가 디스터에 있는 작은 마을인 스프린지까지 운전했다. 여기에도 Gröning 그뢰닝 커뮤니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치유된 것이 이 커뮤니티가 형성된 출발점이었다.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아우구스부르크, 하멜린, 비엔나, 플로진겐을 비롯한 다른 도시에서 경험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여기에서 또 한번 경험했다. 사람들은 앞장서서 그들의 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들을 치료하던 전담 의사를 말했고 건강이 회복된 것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뢰닝 Gröning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도 그들은 기꺼이 손을 들어 이 사실을 말할 것을 맹세하고 있었다.

50세의 하노버 출신의 줄리 프로네르트(Julie Prohnert)는 말했다. ‘아기때부터 저는 양측 대퇴골 골절이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목발이 없이는 걸을 수 없었고 의사는 진통제로 고통을 줄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뢰닝씨의 강연을 들었을 때 저는 강한 반응을 느꼈습니다. 저의 등, 완전 굽었던 저의 등이 다시 펴졌습니다. 저는 다시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 후로 아직까지 재발이 없습니다.”

‘저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계속되는 발진과 농양으로 고통 받아왔습니다. 그뢰닝이 저를 해방시켰습니다’ 하멜린의 빌헬름 가버르트(Wilhelm Gabbert)가 말했다.

‘모르핀을 복용하는 것만이 담낭의 고통을 견디게 해주었습니다.’ 커트 시베리트가 말했습니다. ‘저를 이러한 고통해서 해방시켜주신 브루노 그뢰닝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심한 당뇨병이 있습니다.’ 스프린지의 로버트 타이즈(Robert Thies)는 말을 이어갔다.’더 무서운 것은 약한 심장근육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문제가 더 이상 저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브루노 그뢰닝 덕분입니다.’

이러한 증언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나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해준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한다. 질병들도 두통부터 신경염증, 좌골통, 신장 및 담낭 합병증, 심장병과 마비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나에게 깊은 영향을 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듣는 모든 이들 앞에서 그들은 아주 개방적으로 어떻게 그뢰닝을 통해 내적인 변화를 겪었는지 얘기한 것이다.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과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내적인 고요와 평온 그리고 공동체 중심의 생각 앞에서 길을 내주었다고 한다.

개인의 신념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성공적으로 치유 가능케 하는 동력이다

Horst Mann 박사는 설명한다. “브루노 그뢰닝으로 인해 치유받았다 고 믿는 사람들과의 대화 후 결론적으로 저는 한 가지 궁금점이 강하게 생겼습니다. 치유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가, 혹은 좀 더 강하게 말해서, 모든 병에 가능한가? 그뢰닝에게서 나오는 이러한 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여기에 위험성은 없는가?”

마지막 방문 때 나는 이러한 질문을 브루노 그뢰닝에게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저는 이것을 누구에게 강요하길 원하지 않고 또 할 수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마음을 닫고 있다면, 그래서 조화를 불러 올 에너지에 자신을 열 준비가 안됐다면 저는 그들에게 들어갈 입장이 아닙니다. 제가 하는 일은 사람들이 그들 삶의 건강과 안녕을 지키지 못하게 만드는 악의 고리를 깨뜨리도록 도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나는 또 다른 질문이 있었다. “모든 병은 위험한 정도가 다릅니다. 몇몇 의사도 손을 놓은 아주 아픈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 환자를 위해 아직 그를 포기하지 않은 의사가 자신을 대신하여 당신(브루노 그뢰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면, 도와주실 겁니까?”

“네” 그뢰닝은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환자가 신념이 있고 의사도 그가 취한 길을 신뢰한다면 성공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공동의 신념이 환자에게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만듭니다. 보통 성공은 절실한 사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순간에 가장 빠르게 일어납니다.”

그뢰닝 연맹으로부터 분리

손해배상 검토 기간

Trennung vom Gröning Bund

편협한 관료주의 조직이 벌금형에 처한 브루노 그뢰닝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다

1957년 10월, 브루노 그뢰닝과 그뢰닝 연맹 관리자들과의 관계는 대립으로 끝났습니다. 편협한 관료주의로 그뢰닝 연맹은 브루노 그뢰닝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러한 분쟁이 일어난 원인은 법원 판결 때문이었습니다. 법원이 2,000 마르크의 벌금을 짧은 시일 내에 납부할 것을 브루노 그뢰닝에게 부과한 것이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그의 일을 하면서 돈을 받은 적이 없고, 결과적으로 이렇다 할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뢰닝 연맹은 법원 재판비용을 부담하기로 초기부터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연맹은 2,000마르크를 지급할 의무가 있는지 여부를 관료적 절차로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그 이후에 기금을 마련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브루노 그뢰닝에게 기금이 너무 늦게 도착한다는 것은 예측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연맹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벌금을 내지 못하는 브루노 그뢰닝이 감옥에 가는 것을 그저 서서 지켜보았습니다. 이는 공개적인 갈등과 마침내 분리로 이어졌습니다.

믿음이 없는 친구들

연맹 활동의 검토라고 불리는 62페이지 문서에서, 브루노 그뢰닝은 연맹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친 모든 사항을 지적했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요약하면, “제가 오늘 저의 초기 환경 (메켈버그 부당이득자들, 엔데린, 슈미트, 휠스만)과 현재의 환경(연맹 위원회 구성원들)을 비교하자면, 똑같은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오늘 최종 결과는 그때와 다른 점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저의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 한 일은 그때보다 결코 낫지 않았습니다. 과거 저는 조력자들의 비열한 행위에 배신당했습니다. 오늘 친구들은 저를 고발하여 제가 법정을 통과하는 것을 침묵한 채로 방관하였고, 저는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용 가능한 차량이 없어서 지역 위원회를 방문할 수 없었고, 저를 향한 인신공격에 그 누구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람들이 필요할 때 사람들은 저를 위해 있지 않았습니다. 혼란이 초래되었고 저는 실망했습니다. 제가 지구에 온 이 단 한 번의 생에서 이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세상의 지식과 배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저를 지원하고 지지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친구 중 누구도 저의 입장에 서서 제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이 없었습니다; 제 편에 서서 일어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정말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옹졸한 관료주의에 기반하여 결재에 결재를 거듭하는 동안 누구도 저의 일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 누구도 법정 싸움과 언론을 대적하는 일, 업적을 지지하고, 차량 이용과 중상모략에 대항하는 등등 그 모든 일로부터 저를 단번에 자유롭게 하거나 제가 지구에 온 목적대로 인류에게 삶의 힘을 전하고 사람들을 믿음으로 이끌 수 있도록 길을 닦아준 사람이 없었습니다.

저는 외부 세계에 의해 끊임없이 방해받거나 막힘이 없는 평화와 고요함이 필요했습니다. 제가 방해받지 않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보호벽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물론 저와 친구가 되길 원했던 사람들 모두 말입니다. 그것이 저를 무척 실망하게 했고 매우 애석했습니다.”

・부당이득자들은 이익을 챙기려 했으며, 그들은 나쁜 사람들로 밝혀졌습니다.
그뢰닝 연맹 친구들은 너무 성의가 없고, 무관심하며, 편안함에 안주해있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악의가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결과는 같습니다; 저는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뢰닝 연맹 위원회의 많은 친구들이 그들의 말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저는 행해진 모든 것에 의해 방해를 받았습니다.”

연맹의 실패

바이저는 사임하였고, 공식적인 연맹로 등록된 적이 없었던 그뢰닝 연맹은 이후 바로 해체되었습니다. 그 자리를 대신하여 생명의 영적 자연적 원리 발전 연맹가 생겼습니다. 이 연맹은 1958년 설립되었고, 지도자는 독일 출신 에리히 펠츠와 오스트리아 출신 알렉산더 로이였습니다. 그러나, 브루노 그뢰닝 생전에 만들어진 마지막 단체였던 이 단체 역시 그가 기대했던 것을 전달하지는 못했습니다. 심지어 브루노 그뢰닝의 이름이 조직구성에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대재판 (1955-1957)

과실 치사 혐의로 인한 기소와 완전 치유 금지 명령을 포함한 무죄 판결

Bruno Grönings grosser Prozess1955년 3월 4일 검찰은 브루노 그뢰닝에 대한 혐의를 다시 제기하였습니다. 또 다시 그는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또 다른 혐의에서 그는 과실치사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뢰닝은 치유를 약속하고 의학적인 치료를 거부하도록 한 행위에 대해서 부인하였습니다.

그가 법원 출두 소환장을 받은 후 그뢰닝은 친구들에게 호소하였습니다 "저의 친애하는 친구들이여! 최근 모든 신문, 잡지등의 언론과 라디오는 뮌헨의 검찰 2과가 저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내용을 편향되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제가 1949년 말에 17살 소녀에게 치유를 약속하고 요양소나 의사에게 가는 것을 방해했다는 것입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제가 이 젊은 사람의 죽음에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보도들을 신중하게 읽거나 들은 사람이라면 이러한 보도들의 의도를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것들은 친구들 사이에 혼란을 야기하고, 도움을 구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제가 전파하는 가르침과 우리의 모든 노력들을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저의 활동뿐만 아니라 그뢰닝 연맹, 그리고 여러분의 활동 또한 저지하기 위해 모든 수단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실은 그들이 보도하고 있는 알려진 바와 다릅니다! 저의 친구들이여, 저는 여기서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제가 "치유의 약속을 하지 않는 사실, 그리고 제가 의료진의 치료를 받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등의 의학적 도움을 받는 것에 대해 절대로 부정적으로 조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유난히 늦게 재개된 수사

그뢰닝은 다음과 같이 그의 친구들에게 계속해서 말하였습니다. “저는 1952년에 혐의가 풀렸습니다. 1949년 말 1950년 초에 시작된 '쿠프스 재판'이 모든 서류가 이미 준비되고 법원에 제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1951년과 1952년 사이의 법원 재판 사건들에 포함되어 고려되지 않고 재판에서 제외되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에 관한 새로운 기소 공판이 바로 1953년 11월 22일 무르나우 (Murnau)에서 그뢰닝 연맹 설립이 공표된 바로 그 때에 시작되었다는 것이 눈에 띄지 않습니까! 진실은, 1954 년 1월부터 많은 지역의 그룹 지도자들과 친구들 그리고 협회의 멤버들이 인터뷰를 받고 또한 경찰의 감시 아래 놓여졌습니다."

피고측의 증인들은 거부되고, 검찰측의 증인들은 환영받았습니다.

재판 준비는 2년 이상 장기화되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의 변호인단은 많은 방해를 받았습니다. 그뢰닝에게 유리한 증언을 할 대부분의 증인들은 거부되었고 반대로 검찰 측 증인들은 받아들여졌습니다. 검찰 측 증인 중에는 예전 그뢰닝의 협력자도 두 명 있었습니다. 오이겐 엔덜린과 오토 메켈부르크였습니다. 특히 메켈부르크는 - 첫 번째 재판에서 그는 그뢰닝과 함께 기소되었습니다 - 브루노 그뢰닝에 대해 특히 눈에 띄게 적대적으로 변하여 등을 돌렸습니다. 그는 그뢰닝에게 해를 주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습니다. 그는 과실로 인한 사망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그뢰닝의 "매니저”로서 일을 하고있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입니다.

조작된 루스 쿠후스 관련 사건

1949 년 11월 저축 은행 공무원이었던 에밀 쿠후스 씨는 양쪽 폐에 결핵으로 고통받고 있던 17세의 딸 루스와 함께 그뢰닝의 강연에 왔습니다. 그뢰닝은 이 소녀가 이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단계가 지났음을 바로 알아차렸고 그 자리에 참석했던 의사에게 즉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메켈부르크는 그뢰닝을 압박하여 그가 이 소녀의 케이스를 맡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강연 후 브루노 그뢰닝과 루스 쿠후스가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뢰닝은 그 소녀에게 용기를 가지라고 말했고 그 아버지에게 9일 내에 의학 전문의에게 검사를 받으라고 조언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 의사들로부터 어떠한 치료도 거부하고 있는 딸이 다시 의사의 진료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후 받은 편지들은 메켈부르크가 처리했고 브루노 그뢰닝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1950 년 5월 그는 처음으로 루스 쿠후스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들었습니다. 그 동안 아버지는 브루노 그뢰닝에게 딸을 방문해 주기를 간청하는 편지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메켈부르크는 이러한 편지들을 한번도 브루노 그뢰닝에게 전해 주지 않고 그의 독단적 의지로 쿠후스 씨와 만날 약속 일시 직전에 가서야 메켈부르크는 그뢰닝에게 이 만남에 대해 알리고 그가 함께 동참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중에 메켈부르크는 브루노 그뢰닝이 딸을 치유하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실은 메켈부르크 자신이 그 딸의 아버지에게 그뢰닝이 딸을 치유하도록 설득하겠다고 다짐을 했던 것입니다. 메켈부르크는 이 저축 은행의 공무원인 아버지를 돈줄로 생각하여 돈을 얻어 내기 위해서 그뢰닝이 필요했습니다. 이 방문 직후 그뢰닝은 메켈부르크와 결별하였습니다.

그뢰닝에 대한 심각한 혐의는 그가 루스 쿠후스가 의학적 치료를 더이상 받지 못하도록 금지했다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로, 진실은, 검찰 측 증인 또한 증언한 바와 같이 그뢰닝은 이미 루스 쿠후스와의 첫 만남 때 그녀를 의사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또한 1949 년 가을에 방송된 라디오 연설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끝까지 의학적 검사를 계속하여 받을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는 치유와 도움을 구하려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사를 신뢰하기를 계속하여 항상 충고했습니다.

몇 번이나 고통스럽고 효과없는 치료를 받고 있던 루스 쿠후스는 의사의 치료를 계속해서 거부했습니다. 1950 년 12월 30일에 그녀는 질병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의학적 전문 지식은 치유의 가망이 없음을 다시 확인하였습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의사 오토 프라이 호퍼 박사는 전문가 증인으로서의 그의 소견서에서 루스 쿠후스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습니다. "냉정하게 관찰해보면 비의료전문가가 보더라도 세킹엔의 보건소가 발표했듯이, 루스 쿠후스가 ‘매우 심각한 상태’이며 의사의 진단에서 알아낸 바와 같이 '생명이 위급한' '아주 위험한’ 상태이며, 보통의 인간의 예상으로 치유는 논의의 여지도 없는 그러한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최신의 의학 지식과 첨단 의학/약품을 사용하지만 또한 자연의 힘을 그것이 대체할 수 있다고 믿을 정도로 자만하지 않는 겸손한 올바른 사고와 냉정한 객관적 마음을 가진 의사라면 “1949년 11월 5일 이전에 루스 쿠후스가 치유될 가능성이 높았다고는 전혀 말할 수 없다”라는 뮌헨의 리틴 (Lydtin) 교수의 전문가로서의 증언에 동의할 것입니다. 제 의견에 따르면 환자가 1950년 12월 30 일까지 살아남은 것이 신기할 따름이고, 이것은 그뢰닝의 영향이 그녀의 삶의 연장에 어느 정도 확실히 영향을 미친듯 합니다. 저의 전문가로서의 증언을 마무리하면서, 저는 ‘치유가 일어날 가능성의 여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뢰닝씨가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수명이 연장되었을것이다’ 라는 주장은 어떠한 확실성을 가지고 말할 수 없으며 또한 타당하지 않습니다. "라는 저의 소견을 밝힙니다.”

실패한 법원의 판결

1957 년 7월말, 그 사건에 대해서, 뮌헨 지방 법원의 배심원들이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과실 치사 혐의에 대해 브루노 그뢰닝은 무죄를 선고 받았습니다. 그러나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 위반에 대해선 2,000 마르크의 벌금이 부과했습니다.

판결은 처음에 보기엔 긍정적으로 보였지만 그뢰닝이 받아들이기엔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결과적으로 그의 일 (사명)의 마지막 금지령이었습니다. 그 판결을 그뢰닝보다 훨씬 긍정적으로 판단한 그의 변호사의 판단 실수로 그 판결에 대해 항소를 한 측은 그뢰닝이 아닌 검찰측이었습니다. 두 번째 공판은 1958 년 1월 중순 뮌헨에서 다시 열렸습니다.

그뢰닝 연맹

연맹을 통해 활동이 자유롭게 되길 희망합니다.

Bruno Gröning haelt eine Gemeinschaftsstunde ab치유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가능한한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브루노 그뢰닝은 1950년대 초반에 이미 여러 커뮤니티들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강연만 했으며, 도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그가 알고 있는 바를 전달하는 것에 전념하였습니다.

법적 보호와 유명인사들로 구성된 수뇌부

1953년 11월 22일 、브루노 그뢰닝은 무르나우/제하우젠에서 커뮤니티들의 상부조직으로 그뢰닝 연맹을 창설하였습니다. 연맹은 단체로 등록되어 브루노 그뢰닝의 활동을 법적으로 보호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향후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과 관련된 분쟁을 궁극적으로 막으려 했습니다.

그뢰닝 연맹의 수뇌부에는 제펠린 백작, 마투쉬카 백작, 애니 프라인 에브너 폰 에셴바흐, 헤르만 리딩거 선임공학자, 콘스탄틴 바이써 소장, 그리고 초창기 공동 설립자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갈라선 루돌프 바흐만 등이 속해 있었습니다. 종신직인 연맹의 의장은 브루노 그뢰닝이 맡았습니다

사무장의 돈 욕심이 환자의 안녕보다 우선하다

연맹의 사무장은 하이델베르크의 저널리스트이자 강연자인 에곤 아르투르 슈미트였습니다. 허포드에 있을 때에 이미 그는 이 "기적의 의사"의 측근이었으며 브루노 그뢰닝 친구들 연합 (Ring of Friends of Bruno Groening)이라는 단체를 설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단체는 그뢰닝이 원했던 대로의 기능을 하지 못하고 곧 해체되었습니다. 당시 슈미트가 기부금을 횡령했기 때문에 그뢰닝은 그와 결별하였습니다.

1952년, 슈미트는 다시 그뢰닝에게 찾아가 그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그뢰닝에게 연맹의 구축 일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고, 브루노 그뢰닝은 다시 협력자로 그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슈미트는 그가 진정으로 아픈 사람들의 안녕에 관심이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금전적 이득만 중요시하는지를 보여줄 기회를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

슈미트가 그의 마음가짐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에, 1955년 브루노 그뢰닝은 그와 영원히 결별하였습니다. 그는 여전히 그뢰닝의 능력을 이용해 금전적 이득을 얻으려 했습니다. 결별 후 그는 그뢰닝을 상대로 몇 가지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추후에 그의 자발적인 협력에 대한 금전적인 댓가를 얻으려 하였습니다.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그뢰닝의 활동을 위해 연맹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연맹을 위해 그뢰닝의 활동이 존재하는가?

연맹의 경영은 콘스탄틴 바이써와 헤르만 리딩거가 맡았습니다. 이는 한편으로 매우 큰 기대감을 불러있으켰는데, 그것은 그들이 풍부한 사회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학식이 브루노 그뢰닝의 활동에 도움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 노동자들의 학력 수준이 그들에게 맞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의지에 반하여 그들이 거만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위험 또한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황은 실제로 그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고, 그 두 남자들은 브루노 그뢰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듣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그들은 연맹이 브루노 그뢰닝의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뢰닝 연맹은 점점 더 목적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이를 돕는다는 연맹 본래의 목적 설정은 그들의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치유를 통해 실현하고 있는 이는 그뢰닝이지 연맹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그뢰닝 연맹은 점점 더 본래의 존재 목적과는 반대로 발전되었습니다. 그뢰닝의 이름을 본따 창립된 연맹은 그 이름을 지닌 남자를 위해 자유롭게 해주는 대신 점점 더 옥죄는 감옥이 되었습니다.

치유금지에 관한 첫번째 법원 절차 (1951-1952)

그뢰닝의 의학적 치유활동?

Bruno Gröning angeklagt

공인되지않은(무허가) 의료행위에 대한 기소

1951-52년, 브루노 그뢰닝은 허가없이 치유행위를 하였다는 죄로 기소되어 뮌헨에서 처음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바이에른 내무부는 1949년 그의 활동을 자유로운 사랑의 행위로 보았고, 금후 그것은 의학적인 의미에서의 치유 행위로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혐의는 1939년의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이 법은 그때까지 통용되었던 치유자 자유법을 대신한 것이었으며, 당시의 모든 치유행위를 국가사회주의(나찌) 의사의 손에 맡기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 위반에 대한 찬반

브루노그뢰닝은 1심뿐 아니라 2심에서도 무죄선고를 받았습니다. 뮌헨 법원 의장은 1952년 3월 그의 판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법원은 일방적인 전문가의 증언을 근거로 피고인을 비난하는 것을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뢰닝의 행위가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을 토대로 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극히 의심스럽기 때문인데, 이는 그의 행위가 오늘날 거의 연구되지 않은 영역에 속해있기 때문입니다.”

항소에서 무죄판결이 확인되었지만, 그뢰닝의 활동은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의 의미에서 명확하게 치유행위로 명시되었습니다.

“피고인은 따라서 허가없이, 의사가 아닌데도 사람들의 질병, 고통, 또는 신체적 상해에 대하여 진단, 치료, 또는 구제를 실시하였으며, 이는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에 근거한 치유활동으로 간주된다.”

판단의 오류는 치유금지를 뜻하다

판결은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치유행위의 객관적인 정황에 있어서 판단의 오류 상태에서 치유를 실시하였고, 따라서 고의로 행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유죄판결이 내려질 수 없다.”

브루노 그뢰닝이 했다는 판단의 오류가 판결에 의해 판명되었기 때문에, 무죄판결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위는 법적인 치유 금지와 동등한 의미를 부여받았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이 시점으로부터 자신의 활동이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의 의미에서의 치유행위로 간주되어 금지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의학적 의미에서의 치유행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그의 행위의 진정한 맥락은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사기꾼을 감수했다

브루노 그뢰닝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환할 기회를 줍니다

Bruno Gröning inmitten von Menschen

강제적 금전지불 - 협력자들의 참모습이 드러납니다.

되풀이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뢰닝에게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그중 많은 사람들은, 그뢰닝의 능력을 바탕으로 돈 버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브루노 그뢰닝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은, 추구하던 것들을 얻어내지 못하거나, 그뢰닝이 그들과 거리를 둘 때면, 많은 경우 장기간의 법적 소송을 통해 그뢰닝에게 금전 지불을 하도록 강제했습니다.

예를 들면, 1949년 3월, 휠스만 부인과 남편은, 아들의 치유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브루노 그뢰닝을 헤어포드에 있는 그들의 집에 손님으로 머물게 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을 이용해서 어떤 것도 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녀는 노동 재판소에 그뢰닝을 고소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 무보수로 정한 봉사시간에 노동 보수를 전부 계산해서 밀린 임금을 지불하라고 그뢰닝에게 요구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죽을 때까지 그녀에게 매달 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이 경우 말고도 다른 예는 더 있습니다. 이런 비슷한 식으로 과거에 협력했던 이들은 그들의 참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사람들 또한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보여주기에 필요합니다”

왜 브루노 그뢰닝은 이러한 조짐이 있는 협력자들이 그렇게나 가까이 다가오게 놔뒀을까요? 왜 그는 돈만 벌려는 그와 같은 사람들의 접근을 단순히 막지 않았을까요? 1950년 8월 31일 뮌헨에서 열린 강연에서 그는 이 질문에 대해 답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갖은 수단을 다한 것은, 이 평범한 남자로부터 그의 지식과 능력으로 돈을 버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금광을 발견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얻었지만, 다행히도 이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사람들도 있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어떤 사람이 무관심한 사람인지, 병자가 도움을 받는지 아닌지를 묻지 않는 사람인지 밝혀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병자가 누워있는 것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코 물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 가까이에 있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했습니다. 저는 여기저기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흠, 이 남성이 그렇게 많이 안다면, 왜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요, 혹시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내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당신은 점차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 요소 (사기꾼에 대한 관용)는,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길을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이 신성한 활동의 구성 (브루노 그뢰닝 친구들 모임)에 없었습니다.”

"…그다음에 모든 이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됩니다.”

그레테 호이슬러 (1922-2007), 치유를 경험했고, 오랫동안 브루노 그뢰닝을 조력했으며, “브루노 그뢰닝 친구들 모임”을 창립하심 는 그녀의 저서 여기에 브루노 그뢰닝에 관한 진실이 있습니다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셨습니다. “어느, 작별 인사 시간, 그뢰닝님에게 좋은 것만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뢰닝님, 이제는 당신의 활동에 평온함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부정직한 조력자들도 접근해 오지 않길 소망합니다’ 정말 너무 놀랍게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완전히 틀렸습니다.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입니다.’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뢰닝님은 왜 본인이 이러한 조력자들이며 상황들을 참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저에게 위대한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그들 안에서 품고 있는 본모습을 압니다. 하지만 제가 사람들에게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그는 사기꾼, 도둑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아무도 제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저는 이러한 사람들이 제게 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하고 좋은 것들을 가르쳐 전환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그러고도, 그들이 거짓말하고 속이고, 훔치고 싶어 한다면, 저는 그렇게 하도록 기회를 줍니다. 만약 그들이 선을 배운 게 있음에도 전환하지 않고 그러한 일들을 한다면, 그땐 모든 이들은 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을 완전히 저에게로 다가오게 할 것이며, 비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싸울 것입니다.’”

새로운 길과 막다른 골목

그뢰닝 주변에 몰려드는 사기꾼

Bruno Gröning und Otto Meckelburg

독점적 권리를 가진 자칭 그뢰닝 매니저

북해의 방어루거 출신인 오토 메켈부르크는, 자기 아내를 치유해 준 브루노 그뢰닝에게 감사의 뜻으로 브루노 그뢰닝을 돕고자, 치유센터 건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제시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도 이에 동조하면서 메켈부르크는 그의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1949년 12월 말경, 브루노 그뢰닝은 메켈부르크와 함께 북해의 방어루거로 이동해서 메켈부르크가 기획한 여러 강연회에서 강연하며 수많은 치유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이로써 브루노 그뢰닝은 그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1950년 1월 8일, 방어루거에서 공증된 공식 문서를 통해 메켈부르크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미래 계획을 완전히 메켈부르크의 손에 맡겼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메켈부르크의 계획에 동의하고 이 목적을 달성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헌신했습니다. 즉, 메켈부르크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고 협회 설립과 관련해서 힘 닿는 데까지 도우며, 이후 협회 관련 활동과 앞서 언급한 목표를 성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제 그뢰닝은 상기 목표를 위해 설립 절차를 밟고 있는 협회와 관련해서는 물론, 메켈부르크 개인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브루노 그뢰닝은 메켈부르크 외에 어떤 다른 개인이나 단체에도 이 같은 지원과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으며, 오직 이 협회와 관련이 되고 메켈부르크가 동의했을 경우에만 적극 도왔습니다.

다음해 1월이 되자, 메켈부르크는 그뢰닝 치유법 연구협회를창립했습니다. 메켈부르크 자신이 이 협회의 총책임자가 되어 당시 독일 마르크화로 매달 1000마르크의 수입을 받아갈 수 있었지만, 정작 치유자인 브루노 그뢰닝은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메켈부르크가 처음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음이 더욱 명백해졌습니다. 그는 단지 브루노 그뢰닝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생각하며, “마구간에 매어놓은 최상급의 말”이라는 모욕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메켈부르크에게 치유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약을 이용해서 브루노를 묶어놓고 이 “기적의 치유자”가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대로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950년 6월이 되자, 마침내 브루노 그뢰닝은 메켈부르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있었지만, 이에 대해 메켈부르크는 복수를 다짐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 부숴버리겠어. 뼈도 못추리게 만들어 버리겠어”

자연치유사의 강의 제안

얼마 후, 브루노 그뢰닝은 자연 건강치유사인 오이겐 엔덜린과 함께 뮌헨에서 몇 달간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트라버호프에서 치유를 받았고, 그 보답으로 그뢰닝에게 강연회를 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엔덜린 역시 치유를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돈을 벌어 사업적인 이득을 취하고자 함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기 보다는 “기적의 치유자 브루노 그뢰닝 ”을 이용해서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결국 그 해 말이 되자, 브루노 그뢰닝은 엔덜린과 결별하고 1952년에서 1953년까지 이어지는 동업자 관계도 같은 이유로 무산되었습니다.

출세 제일주의 치유자

이후, 브루노 그뢰닝은 그래펠핑에 있는 바이커스하임 하숙집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저널리스트인 쿠르트 트람플러 박사가 브루노 그뢰닝을 섭외해서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트람플러 박사는 1949년 가을부터 브루노 그뢰닝에 대해 들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뮌헨 신문에 실을 기사를 작성하기 위해 “트라버호프”로 파견되었는데, 거기서 불편했던 다리가 낫게 되는 예기치 않은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트람플러 박사는 위대한 전환이라는 책을 한 권 쓰고, 그뢰닝 사건을 해당 관청에 의뢰했습니다. 엔덜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래펠핑 강연은 늘 성황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트람플러와의 협력 역시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습니다. 어느날 트람플러는 그뢰닝에게 충분히 배웠다고 생각하고 브루노 그뢰닝을 떠나 치유사로 독립했습니다.

트라버호프 - 로젠하임으로 밀려온 인파

1949년 9월, 그뢰닝에게 매일3만명 정도의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01 Bruno Gröning am Traberhof 02종결된 하이델베르그에서의 조사 이후, 브루노 그뢰닝은 1949년 8월 독일 남부로 향했습니다. 그는 그를 둘러싼 소란으로부터 멀리하기를 원했으므로 뮌헨 근처 로젠하임의 사유지로 물러났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소재를 비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문이 그가 바이에른에 도착한 것을 보도한 이후, 인파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3만명정도의 사람들이 로젠하임의 트라버호프로 몰려왔습니다. 신문, 라디오와 주간 뉴스프로그램이 사건을 보도하였습니다. 그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그뢰닝” 이라는 타이틀의 영화도 제작되었습니다.

성서의 장면들

9월의 둘째 주, 신문사 차이퉁스블리츠 는 스페셜 이슈에서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그뢰닝이 관중들에게 연설하기 위해 발코니에 모습을 보이고 그의 치유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간을 기다리며 일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장시간 동안 습한 더위속에서 함께 모여있었습니다. 군중들은 그의 ‘치유의 광선’을 충만한 기쁨으로 받기위해 빼곡히 서있었습니다. 휠체어나 의자에 앉아있거나 주변에 홀로 서있던 중환자들에게 일찍부터 이미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반소경들이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장애인들이 다시 일어났습니다, 마비된 사람들이 굳은 사지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병든 부분에 고통이 증가하는 것을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당김, 찌르는 느낌, 가려움, 설명하기 어려운 가뿐한 느낌, 또는 갑자기 사라진 두통들에 대해서도 진술했습니다.“

성서와 같은 장면들은 트라버호프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뢰닝이 나타났던 어느 곳이든 그는 즉시 셀 수 없이 많은 병자들에게 둘러싸였습니다. 아니타 호너는 그녀의 책 영적인 치유자들 오늘에서 그뢰닝의 주변 상황들에 대해 묘사했습니다: “그뢰닝이 단지 그의 도착을 알린 것에 불과할 때, 이미 순례여행은 시작되었습니다. 루돌프 스피츠라는 한 신문기자가, 1949년 9월 그뢰닝이 뮌헨을 방문한 것을 관찰했던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오후 7시, 수천명의 사람들이 존넨스트라세(태양거리)에 서있었습니다. 밤 10시30분,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5년간의 전쟁 동안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그 네 시간 동안 브루노 그뢰닝을 마주하여 앉아 경험한 불행과 고통의 끔찍한 행렬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없었습니다. 간질 환자들, 소경, 목발에 기댄 절름발이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어머니들은 불구가 된 아이들을 그에게 데려 갔습니다. 의식불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움을 절규하는 소리, 부탁, 소망, 깊은 한숨이 있었습니다.‘“

정부 공무원들이 선의를 인정하다

아니파 회네가 언론인 루돌프 스피츠를 계속해서 인용합니다: ‘들것에 실린 환자, 절름발이, 거대한 군중을 뮌헨의 또 다른 언론인 쿠르트 트람플러 박사가, 그뢰닝이 과거에 살았던 로젠하임의 트라버호프에서도 보았습니다. 트람플러는 주간신문 뮌헨 알게마이네 기자로서 그곳에 왔습니다 -그는 직접 보고 들은 것만을 보도하는 냉철한 언론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발코니에서 그뢰닝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창문쪽으로 서둘러 갑니다. 뮌헨 경찰서장 피처씨가 관중을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뢰닝이 도착한 이후 수년 동안 앓던 좌골신경통이 개선되었다고 진술합니다. 피처씨는 결코 과민한 상상을 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자신에게서 스스로 관찰한 것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는 그뢰닝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CSU 정치인 하겐씨 또한 이와 유사한 연설을 하며 그를 뒤따릅니다.“

바이에른 당국 또한 브루노 그뢰닝에게 호의를 보였습니다. 일간지 뮌헨 메르쿠어 는1949년 9월 7일, “그뢰닝에 대한 호의”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습니다: “에하르트 장관은 월요일 기자회견에서 브루노 그뢰닝같은 ‘특별한 현상’은 합법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견해로 보아, 그뢰닝이 바이에른에서 일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다고 봅니다.”

바이에른 내무부는 언론에서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그뢰닝의 치유활동에 대한 초기검사는, 그것이 자유로운 사랑의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에 따른 허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명예훼손 이후 치유의 의료문서까지

트라버호프에서 그뢰닝을 둘러싼 많은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곳에는 그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여 이득을 보고 싶었던 많은 사업가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의 명성과 외관을 손상시켰으며, 그것은 당국이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을 초래했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그뢰닝은 바이에른의 산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는 치유센터가 건설될 수 있는 몇몇 제안들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도움을 찾는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치유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의료진들이 하이델베르그 유형에 따라 치유 전후의 검사를 실시하고, 일어난 치유들을 기록할 것입니다.

“그뢰닝 현상”과 과학

하이델베르그에서 의학적인 조사가 서면 인증을 약속합니다

Bruno허포드에서의 시간 동안에, Revue 잡지의 의학 전문 기고가들은 그뢰닝의 치유 성공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Marburg 출신의 심리학자 피셔 교수는 특파원과 함께 허포드를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치유된 사람들과 인터뷰를 한 후 매우 놀랍도록 그뢰닝의 방법이 진실되게 성공한 것임을 확인했습니다. 결과적으로 Revue 잡지는 “그뢰닝 현상” 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을 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이델베르그의 대학 클리닉이 "기적의 의사"의 "치유 방법"을 조사하였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피셔 박사가 긍정적인 전문가 평가를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그의 제안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뢰닝은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를 희망했습니다.

의사 눈 앞에서의 치유 – “브루노 그뢰닝은 사기꾼이 아니다”

조사는 7월 27일 시작되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기술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도움을 청한 80,000 명이 넘는 환자들 중에서 일부를 선발하였습니다. 또한 하이델베르그의 루돌프 크레 클리닉 환자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철저한 검사를 받았으며 정확한 진단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뢰닝은 자신에게 온 사람들에게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의사들도 계속 참석하였고 몇몇 질병들이 자발적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그 후 클리닉에서 검사를 통해 치유를 확인했습니다. 심지어 강직성 척추염과 같은 불치병조차도 치유되었습니다.

Revue 잡지에서 재현한 보고서에 따르면 피셔 박사는 브루노 그뢰닝은 사기꾼이 아니라 자연으로부터 선물받은 영혼의 의사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는 브루노 그뢰닝을 평가하지 않고 자신의 관점에서 “그뢰닝 현상”을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뢰닝은 부당한 이득을 금지합니다.

치유를 허가하는 최종 인증서는 모든 결과를 평가한 후에 발급될 예정이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이 방법이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만든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동안 피셔 박사와 모든 행사를 담당한 위저커 박사는 브루노 그뢰닝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치유 센터를 만들고 싶었고, 거기에서 브루노 그뢰닝이 의사들과 함께 일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환자의 관리와 선택은 의사들 담당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청에 브루노 그뢰닝은 답변을 하였습니다. “이 제안과 관련한 재정적인 문제들을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당연히 이 일에 투자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이 문제에 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저는 피셔 박사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제 명의로 된 돈이 없기 때문에 제가 이행할 수 없는 재정적인 계약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사업을 고려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저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게다가 저는 제 부름에 속한 일만 하기를 원합니다.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을 돕고, 저 자신을 심리치료사와 같은 의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서 사업을 꾸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인증서의 부재 및 법률과의 잠재적인 분쟁

브루노 그뢰닝의 반대는 교수들의 관심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약속한 인증서는 발급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을 자유롭게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대신에 새로운 장애물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습니다. 연구가 진행된 결과 그의 “치유 방법”은 “치료”, “환자”와 같은 단어들을 사용하여 의료 행위로 판단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과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49 – 세상의 주목을 끌다

허포드에서의 브루노 그뢰닝 행적

Tausende

수천의 병자와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뢰닝을 에워싸다

아홉살의 디터 휠스만은 한동안 병상에 있었습니다. 그는 진행성 근이영양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는데, 그를 진찰하였던 그 어떤 의사나 교수도 그를 도울 수 없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이 그 소년에 대해 관심을 가지자, 그는 갑자기 다시 걸을 수 있었습니다. 엔지니어였던 휠스만씨는 갑작스러운 아들의 치유에 깜짝놀라 브루노 그뢰닝에게 더 머물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기적의 남자”가 더 많은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도록 다른 병든 사람들도 초대하고 싶었다고 휠스만 씨는 말했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날이면 날마다 도움이 필요한 더 많은 사람들이 도착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뢰닝을 둘러싼 기적적인 사건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신문은 “기적의 의사”에 대해 보도했고, 영국 지역에서 그는 매일같이 대화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필헴스플라츠로 쏟아져왔고, 군중들이 그 집을 에워쌌습니다.

일간지 뮌헨의 메르쿠르의 만프레드 뤼겐호르스트는 1949년 6월24일에, “내가 허포드에 오전 10시30분경 도착하였을 때, 거의 천명의 사람들이 필헴스플라츠의 2층집 앞에 서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그림이었습니다. 휠체어에 탄 사람들, 친척들에 의해 온 사람들, 시각장애인, 농아자,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편한 아이와 함께 온 엄마들, 나이든 여자들과 젊은 남자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거의 백대의 자동차, 트럭, 버스가 광장 주변에 주차되어 있었는데, 모두 멀리서부터 온 것이었습니다.”

마비, 궤양, 실명: “그뢰닝이 나를 쳐다보았고, 지금 나는 완전히 건강합니다.”

만프레드 뤼겐호르스트는 계속합니다, “당신은 치유될거라고 믿습니까?” 나는 병자들 중 한 명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당신은 어제 여기 있었어야 했어요. 브루노 그뢰닝은 여기 없었지만, 라인란트의 비에르슨과 광장에서는 다섯 명의 불구자가 일어섰고 치유되어 집에 갔습니다. 원거리 치유 – 마당에서 치유되었습니다.’ 다른 병자들이 그 얘기가 사실임을 확인해주었습니다.

나는 군중 속으로 더 들어가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 책 한 권을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내가 담배에 불을 붙였을 때 내 가까이 있던 한 젊은이가 말하기를, ‘한 개비만 파시죠!’ 그는 단체복 외투를 입고 있었는데, 러시아에서 귀국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나는 그에게 담배 한 개비를 주었습니다. 그가 불을 붙이며 떠들썩하게 말하기를, ‘보세요, 난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어요.’ 그는 그의 오른쪽 팔을 움직이면서 그의 손가락과 그리고 그의 오른쪽 다리를 함께 움직였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이 당신도 치료했나요?’ 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예, 러시아에서 내 오른쪽이 마비되었었죠. 브루노 그뢰닝이 나를 쳐다보았고 지금 나는 완전히 건강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요.’ 행복하게, 그는 그의 팔다리를 흔들었습니다.

저는 약 40세로 보이는 백발의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무리쪽으로 갔습니다. ‘물론이죠’, 라고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저는 브루노 그뢰닝으로부터 치유받았습니다. 커다란 위궤양이 있었는데, 계속 살이 빠지고 밤에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어요. 그뢰닝과 함께 저희들 12명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쳐다보았고, 마치 궤양이 땅에 돌처럼 떨어지는 것을 느꼈어요. 그 이후로, 저는 어떠한 통증도 없습니다. 다시 체중이 늘고 있으며, 제가 요청한 엑스레이에서 궤양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저는 제 자신을 의료 검토 위원회에서 살펴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얘기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 부인이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 주 광장에 한 맹인이 있었어요. 그는 쉬지 않고 며칠 밤낮을 기다렸지요. 저는 자주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측은해서 그 분을 식사에 초대했었어요. 그는 ‘아닙니다. 저는 브루노 그뢰닝이 나오는 그 순간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며 거절했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약간의 롤빵을 가져다 주었고 누군가가 당신을 기차역까지 데려다 줄거라 말했습니다. ‘저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저는 혼자서 역으로 걸어갈 수 있게 될 거거든요.’ 그리고 그때 저는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이 나왔고, 그리고 그 젊은이가 소리쳤는데, ‘다시 보여요!’ 진실로, 그의 눈에서 베일이 벗겨졌습니다. 그는 제가 가지고 있던 손가방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자동차가 지나가요, 번호판이 있어요,’ 라고 말하면서 혼자서 역으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근처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이 기쁨으로 흐느꼈습니다.’

시 관계자 및 의료계로 부터의 치유금지

머지않아 당국 또한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조직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브루노 그뢰닝은 치유가 금지되었습니다. 몇몇 영향력있는 의사들이 그의 명백한 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의 활동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하였으며, 치유능력을 과학적으로 테스트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치유 금지의 진짜 이유는, 영향력있는 관련 의료인들의 다음 진술에서 명확합니다. “그뢰닝은 그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치유 허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은 그뢰닝과 연관된 의사들의 전문적인 명예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6월말에 그는 영원히 허포드를 떠나야 했습니다. 치유 허가를 얻기 위한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직업과 그의 인생의 결정적인 근거지들

계획한 활동들을 위한 준비

Bruno

외부의 강요로 중단된 견습과정들

5학년까지 학교를 다닌후, 브루노 그뢰닝은 상업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아버지의 강요로 그것을 2년 반 만에 중단해야 했습니다. 벽돌공의 감독 일을 하시던 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같은 기술을 배우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렇게 그는 목수가 되기 위해 견습생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또한 완수되지 못했습니다. 견습이 마감되기 3개월전 종전 이후의 혼란 가운데 그가 일하던 회사는 주문부족으로 인해 폐업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그는 다양한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에곤 아투아 스미트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는 손대는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었습니다.”

“그의 여러 동료들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시계 수리나 라디오 수리 또는 자물쇠공같은 수공업에 관한 어떤 일이던 눈에 띄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그는 기술을 요하는 일에 특출났습니다. 또한 거칠고 육체적으로 힘겨운 일을 맡아하는데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항만 근로자로 일할 때 그는 무거운 무게를 옮기곤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도달해야하는 고지에 이르기 위해서 이런 거친 일들이 그가 해야 하는 과정의 하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옛속담은 이렇게 말합니다. “늪에 빠져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그의 초창기의 동료들 사이에서 진술된 많은 보고서들 중 최근에 읽었던 한 보고서의 저자는 그와 함께 일 년 동안 일했으며, 그가 함께 일했던 동료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에 대해 좋은 추억들을 갖고 있다고 망설임없이 명백하고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결혼 그리고 가정의 불운들

그는 21세에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그가 가부장의 한정된 역할만 하기를 원했고 “엉뚱한 것”같은 치유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1931년과 1939년에 각각 태어난 두 아들 하랄드와 군테르는 9살의 나이로 사망하였습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브루노 그뢰닝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였으나, 게르트루드 그뢰닝은 그녀의 남편의 치유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그에게 맡기지 않고 의사에게만 데려갔습니다. 그러나 의약으로 그들을 살릴 수 없었습니다. 두 아이 모두 병원에서 사망하였는데 하랄드는 1940년 단스크에서 그리고 군테르는 1949년 딜렌버그에서 사망하였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의 운명에서 이 일은 큰 타격이었습니다. 훗날에도 그의 두 아들에 대해 얘기할 때면 여전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시간은 그가 계획한 일을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삶에서 여러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심정과 절실한 결핍을 올바로 인식하고 이해하기 위해 이런 고통스런 경험들을 겪어야했습니다.

총격이 아닌 봉사 - 전선에서 그리고 전쟁 포로로써

2차대전기간인 1943년 브루노 그뢰닝은 군대로 징집되었습니다. 이때 그가 사람들을 향한 총격발사의 거절로 군상사와 출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군 법정에 서야했습니다. 결국 그러나 전선으로 보내졌고 그는 부상을 당해 러시아의 전쟁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난민이 되어 서독으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기간 중 브루노 그뢰닝의 처신은 봉사라는 그의 소망에 기반했습니다. 전선에서도 그는 동료들이나 민간인들을 돕는 모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러시아의 한 마을에서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군대의 식량창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포로 당시 그는 다른 포로에게 보다 나은 의류와 보다 나은 대피소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기아 부종으로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뢰닝의 도움으로 건강을 되찾았습니다. 전쟁의 끔찍함에서도 그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이혼과 인간애에 전념

1945년 12월, 그는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과 함께 히즌의 딜렌버그에 새 삶의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둘째 아들의 사망 그리고 그의 아내가 그의 봉사활동을 저지하려고 시도한 이후에, 그는 그녀와 이혼하게 됩니다. 그는 그에게서 나오는 치유의 힘을 모든 사람들이 전달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가 “저는 개인에 속하지 않습니다. 저는 인류에 속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1949년 초, 그는 이질병자들의 구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치유된 몇몇 사례의 보고서로 인해 브루노 그뢰닝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그를 필요로 하는 곳, 병든 자가 도움을 요청하는 곳으로 집집마다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그는 1949년 3월 헤포드의 한 엔지니어로부터 그의 아들을 만나달라는 초대를 받기 전까지 작은 모임들을 통해 활동하였습니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

매맞고, 조롱당하고, 이해 받지 못하고 거부당한 -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아이

Bruno Gröning wurde am 31. Mai 1906 in Danzig-Oliva als viertes von sieben Kindern geboren

그는 주의의 냉담함을 피해 자연으로 도피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신을 경험하였습니다."

브루노 그뢰닝은 1906년 5월 30일 단치히의 올리바에서 아버지 아우구스트와 어머니 마가레테 사이에서 7남매중 4번째 아이로 태어났습니다. 브루노의 부모는 이미 일찍부터 브루노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원래 겁이 많은 토끼나 사슴이 그가 있는 곳으로 느닷없이 찾아와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브루노가 쓰다듬는 손길을 받아들였습니다.

성장과정에서 브루노 그뢰닝은 점점 더 자신의 주변환경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뢰닝은 가끔 집에서 검푸른 멍이 생길 정도로 맞았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같은 구타는 그의 몸에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것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혹한 주위환경으로 인해 버림받았다고 느낀 어린 브루노는 자연에서 피난처를 얻었습니다. 그는 특정 사람들보다 동물, 나무, 관목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때때로 몇시간씩 근처 숲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신을 경험하였습니다. 모든것, 수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동물 한마리, 한개의 돌멩이에조차 신은 있었습니다. 나는 몇시간씩 서 있을 수 있었고, 시간 감각을 잃어버렸으며 내 안의 존재가 끝없이 확장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또래 아이들의 주먹 다짐에 결코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자주 욕설을 듣고 얻어맞거나 벌을 받곤 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에 일어난 치유에 기뻐하다

마침내 브루노 그뢰닝의 진면목이 알려지면서 그는 세상의 각광을 받았습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과 동물들이 건강해졌습니다. 특히 1차 세계대전중 그는 종종 야전병원을 방문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많은 부상병들은 그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건강해지거나 했습니다. 환자들 또한 그의 어머니에게 어린 브루노를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가족과 지인들은 이 작은 소년의 치유 능력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

브루노 그뢰닝이 쓴 그의 일대기: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있으면 아픈 사람들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말다툼을 하거나 격앙된 상태에 있다가도 나의 몇 마디 말에 의해 완전히 진정되었다. 어렸을 때 나는 보통 겁먹거나 사납다고 여겨지는 동물들이 내게는 온순하거나 길들여진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조적으로 나와 내 가족과의 관계는 긴장되고 기묘한 관계였다. 나는 가족으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위해 일찍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기위해 노력했다."

브루노 그뢰닝(1906-1959)

비범했지만 논란의 중심이 된 인물

Bruno Gröning in Herford1949년 브루노 그뢰닝의 이름은 하룻밤 사이에 독일에서 누구나 아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와 관련된 보도가 언론 및 뉴스영화, 라디오 방송에 나왔습니다. “기적의 의사”라고 불리게 된 후, 그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건들은 전국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에 관한 영화가 만들어졌고, 과학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정부 당국의 최고 관료들이 브루노 그뢰닝에게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사회부 장관은 자연요법의사의 활동법 위반으로 브루노 그뢰닝을 기소했습니다. 반면, 바이에른 주 총리는 그뢰닝이 몇 가지 서류상의 적법성 문제로 인해 진탕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례적인 일"은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이에른 주 내무부는 그의 활동을 "무료로 하는 사랑 나눔 활동"으로 설명했습니다.

그 사건은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격렬하게 대립하면서 다루어졌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격해졌고, 성직자, 의사, 언론인, 정치인 그리고 심리학자 모두가 브루노 그뢰닝에 대해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의 기적적인 치유 능력이 신으로부터 받은 은총의 선물이라고 여겼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를 사기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치유들은 사실이었고, 의학적 검사들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

1906년 그단스크에서 태어난 브루노 그뢰닝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난민으로 서독으로 이주한 순박한 노동자였습니다. 전쟁 전 그는 목수, 공장 및 항만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대중의 관심을 받는 중심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기적적인 치유에 대한 소문은 전세계에 퍼졌습니다. 모든 국가에서 아픈 이들과, 청원 및 제안들이 들어왔습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그가 일하는 곳마다 찾아 순례를 했습니다. 의학의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금지법 굴레 속에서 일어난 법정 소송 사건들과 폭리를 취한 조력자들

하지만 반대 세력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브루노 그뢰닝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최대한 힘을 썼습니다. 법정 소송들과 치유활동 금지령들이 계속해서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그의 활동을 기존 사회 구조로 통합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회 체제 계층에 있는 기득권자들의 저항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금전적 이익만을 탐하는 그의 일부 조력자들 때문이었습니다. 1959년 파리에서 그가 사망했을 때, 그에 대한 마지막 소송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송 절차는 중단되었고 최종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Grete Häusler Verlag

그레테 호이슬러 출판사: 많은 종류의 도서와 잡지, CD, DVD , 달력을 발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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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브루노 그뢰닝의 가르침에는 흥미로운 양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